바이블가든

식물의 올바른 명명법 (참고)

2015-09-02 (수) 10:35 조회:1584 121.xxx.243

장진성, 연세대학원신문 206호(2015/02/18)

1707년은 스웨덴에서 카롤루스 린나이우스Carolus Linnæus가 태어난 해였다. 스스로 붙인 이 라틴어 이름보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이름은 칼 폰 린네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식물의 학명scientific name 즉 라틴어로 된 명명 방식을 처음 확립한 것이 바로 그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항해 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의 식물이 한꺼번에 다량으로 유입되면서 식물의 이름과 체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린네는 인위적인 분류체계와 학명의 사용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는 오늘날 분류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단 하나의 올바른 이름

‘외’라고도 불리는 오이는 영어로는 큐컴버cucumber, 일본어로는 큐리キュウリ, 스페인어로는 페피노pepino라고 불린다. 굳이 국경을 건널 필요 없이, 한 언어권 안에서도 식물의 이름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패랭이꽃은 한자어로는 구맥瞿麥이라고 하며, 이 외에도 석죽화, 대란, 남천축초, 죽절초 등 수많은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국공통어가 존재한다. 바로 학명이다. 세계 어디를 가든 오이는 ‘쿠쿠미스 사티부스Cucumis sativus L.’이고, 다른 많은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패랭이꽃의 정식 명칭은 ‘디안투스 치넨시스Dianthus chinensis L.’다. 마찬가지로 데이지는 ‘벨리스 페렌니스Bellis perennis L.’이고, 후추와 느티나무는 각각 ‘피페르 니그룸 Piper nigrum L.’과 ‘젤코바 세라타Zelkova serrata (Thunb.) Makino’라고 부른다.

식물의 학명을 지을 때는 린네가 1753년 『식물의 종』에서 제안한, 라틴어를 통해 속명과 종소명으로 구성된 이명법二名法을 원칙으로 한다. 학명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학명을 지은 사람의 이름을 덧붙여야 한다. 예를 들어 벼의 학명인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 L.’에서 앞의 두 단어는 속명과 종소명이고, 끝의 L.이 말해주는 것은 명명자가 린네라는 사실이다. 속명의 첫 자는 항상 대문자로 쓰고, 첫 두 단어는 반드시 이탤릭체로 표기한다.

학명을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반명 혹은 지방명이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학명은 전 세계에서 공통으로 통하는 단 하나의 ‘올바른’ 이름, 정명correct name이다. 학명은 규약에 따라 합법적인 틀 내에서 사용되어야 하며, 그런 틀을 지켜도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나 애매모호한 종의 이름을 사용할 경우 서명illegitimate이라 해서 사용 불가로 규정된다. 그리고 규정을 지킨 이름 중 가장 먼저 발표한 이름에 대해 선취권을 인정해 정명으로 사용한다.

곰팡이, 조류, 식물을 위한 국제명명규약

그렇다면 합법적인 학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건이 필요할까? 첫째, 유효하게 발표되어야 한다. 즉 식물학자가 쉽게 이용하는 도서관, 일반인 또는 기관에 대해 판매·교환·증정되는 유인물에 실려야 한다. 둘째, 라틴어화한 이름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셋째, 조합명combination name일 경우 이미 발표된 이름의 출처를 올바르게 언급해야 한다. 넷째, 신종일 경우 이후 기준표본을 지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신종을 기재할 때 기준표본의 종류와 소장기관명을 언급하지 않거나, 신종을 학회지나 책으로 발표하지 않고 학위논문에만 기재한 경우에는 비합법명이 되어 사용이 불가하다.

식물의 학명체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국제식물명명규약’이다. 린네의 학명체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문제점을 드러냈고, 분류학계에서는 논란이 이어졌다. 이에 1800년대 후반에는 디 캔돌Alphonse Pyramus de Candolle이 학명 사용을 위한 규칙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그러나 규약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라틴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유럽파’와 영어로 기재할 것을 주장한 ‘미국파’의 충돌을 비롯해, 보관된 식물, 즉 기준표본을 증거 자료의 근간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그림 혹은 기재문으로 대신할 것인지를 둘러싼 분쟁이 먼저 해결되어야 했다. 이윽고 합의하에 규약의 골격은 갖추어졌지만,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그 완성은 미뤄졌다. 국제식물명명규약이 정식으로 형태를 갖춘 것은 1950년 제7차 스웨덴 스톡홀롬 학회에서 『택손Taxon』이라는 식물분류학 잡지가 만들어지면서부터였다. 한편 ‘국제식물명명규약’이라는 명칭은 2011년 호주 멜버른 학회에서 곰팡이와 조류 학자들의 반발을 수용해 ‘곰팡이, 조류, 식물을 위한 국제명명규약’으로 개명되었다. 멜버른 학회에서는 또다른 중요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라틴어로 종 기재를 요구하던 기존의 규약이 영어 혹은 라틴어 둘 다 사용 가능하도록 개정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학명 자체에는 반드시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다.

끝없는 격전지대, 분류학

분류학은 라틴어를 근간으로 하는 학문이라 언어적으로 우리 동양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3백 년 동안 아시아의 식물 연구는 주로 유럽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특히 서구 학문의 유입 시기에 외세의 개입을 겪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보다 실정이 더 열악한 편이다. 한반도의 식물 연구는 주로 20세기 초 미국인과 일본인에 의해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국내의 고전문헌과 기준표본 등의 자료는 대부분 외국에 소장되어 있다. 6.25 전쟁 때 많은 자료가 소실된 것도 불운 중 하나였다. 또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명명규약의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아 법 조항 해석의 어려움이 크다. 분류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학명 명명법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은 부재한다. 이런 복합적 원인 때문에 국내 분류학은 독립적인 발전의 길을 걷지 못하고 외국에 종속된 채 점점 국제적 수준과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전 세계가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한 기록물 관리에 몰두하면서 분류학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자료를 공유하는 차원에서 고전문헌과 표본 자료를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과거에 비해 정보 습득이 용이해졌다. 비록 뒤처지기는 했지만 한국 분류학에도 발전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학명은 유일한 것이지만, 사실 고정된 것은 아니다. 분류학자들의 연구가 지속되는 한 학명은 계속 바뀌게 된다. 모든 식물에는 오직 하나의 올바른 이름이 존재한다는 규약에 따르는 분류학자들은 사실 ‘가장’ 올바른 이름을 찾아내고자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분류학자들은 과거 문헌과 식물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진행하며 이를 통해 올바른 이름을 찾아내고 또 정리하고 있다. 분류학은 한번 결정된 사항을 고수하고 정리할 뿐인 죽은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증거 자료와 연구를 통해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과학의 한 분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