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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첨부#1 제1장_헬라주의_시대에_있어서_유대교의_정치사.hwp (0KB) (Down: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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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주의 시대에 있어서 유대교의 정치사
제1장 헬라주의 시대에 있어서 유대교의 정치사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는 과거 수세기의 격변하는 역사의 유산이다.
예수시대의 유대교가 처한 상황은 유대교가 형성되게 된 역사적 배경과의 관련하에서만 적절하게 서술될 수 있다

1. 페르샤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역사는 바빌론 유배 시대에서 시작

북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유다 왕국은 -587년 바빌론에 의해 점령, 예루살렘 파괴
                   지배층 유배 - 율법 엄수(의식 거행 금지)
                                  선민 의식 - 안식일, 할례 계명 준수

페르샤 왕 Kyrus  -539년 바빌론 입성,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배
  대대적 이주나 국가 종교 신봉 요구 않음 - 민족의 독자성 존중,
  아람어 사용 - 페르샤 정부는 직무상의 거래를 위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던 아람어를 사용
  예루살렘 성전 재건 허락 - 성전 기물 되돌려 줌(에즈 6,3-5)
      유배지에 살던 유대인 - 돌아가지 않음
      남아 있던 유대인 - 생활 어려움

5세기 바빌론에 살던 유대인 - 예루살렘 공동체 재건 (에즈라, 느헤미야)
   느헤미야 - 예루살렘 성벽 재건, 이방민족과의 결합 금지
   에즈라 - 율법(왕의 명령 위에 율법을 둠)
             ( - 유대인들이 율법의 구속을 받고 왕의 포고가 율법을 보증
               - 페르시아 국법으로서의 효력 )
     유대인 공동체 의식은 페르시아 당국의 보호 아래 있게됨

사마리아  주민
- 앗시리아에 의해 점령된 후 이방 주민들이 정주(2열왕 17장)
       그 후손은 예루살렘 공동체에게 순수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인정 받지 못함
       유대인은 그들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 하였으며, 어떠한 교역이나 거래도 하지 않았다.
- 사마리아와 유대의 정치적 분리 초래
  모세오경만을 인정(정경의 한계가 확정되기전에 분리 - 기원전 4세기)
- 그리짐(Garizim)에 성소 건축  
   (Josephus는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에서 성전을 건설하도록 재가를 받았다고 기록)
   그리짐이 모세의 율법에서 정확히 제시된다고 지적(신명 11,29: 27,12-13)
- 성소 건축 후 유대인과는 적대감 더욱 격렬
- Garizim 성소 파괴( -128년 Johannes Hyrkan)

예수 시대
-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교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생겨난 분열을 극복 하였으며
   복음을 사마리아에 전파 하였다.

요한 4,9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루카 17,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요한 8,48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인이고 마귀 들린 자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 하였다

루카 9,51-56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요한 4,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루카 10,30-37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마태 10,5-6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사도 8,4-2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요한 4,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 4,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타인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샤의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파(-333년 Issus의 전투)  
-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 유대는 저항없이 Parmenio 사령관에 항복
   유대인 공동체가 누리던 권리의 상황에 대한 지배권의 변화에 따라서
       외적인 변화 : 전혀 일어 나지 않았지만
       내부의 생활 : 온 나라 안에 희랍인들이 들어 오게 됨에 따라 깊은 영향을 받았다.
                     아랍인들은 희랍문화, 예법 등에 스스로 개방
                     유대인들은 희랍인들과 직접 이웃 - 두가지 언어 사용(사도 22,2)

바오로가 히브리 말로 자기들에게 연설하는 것을 듣고 더욱 조용해졌다(사도 22,2)

언어와 더불어 헬라주의 문명이 또한 이 땅에 들어 왔다.
- 희랍 건축물(극장, 목욕탕, 경기장)
- 축제 때 식탁에서 식사(참조 마르 14,18; 22)
   그들이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르 14,18)
- 의술의 사용(마르 5,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26)
- 헬라주의화 (1마카 12,21)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스파르타인과 유다인은 형제로서 둘 다 아브라함의 후예라는 사실이 어떤 문헌에서 발견되었습니다.(1마카 12,21)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323년) -정치적 혼란
  이집트 주둔 톨레메우스(Ptolemäus) 팔레스타인 점령 → 시리아 Antigonus (-315년)
  → 총독들의 공동 대항 → Ptolemäus 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부 지배권

- 예루살렘의 유대인 공동체가 가진 종교나 내정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았다.
    유대인 사회의 정치는 대제사장(수석사제)의 손에 달려있게 된다.
    유대인들의 정치기구 : 산헤드린 공의회
       유대인들의 영향력 있는 가문들과 사제들, 장로(원로)들의 모임(수석사제가 의장)
       유대 민중들이 처한 모든 세상적인 용무와 종교적인 용무를 처리(유대인 최고 관청)

수석사제들과 서기관(율법학자)들, 또는 수석사제(Hohenpriester)들과 원로들 등의 언급
- 산헤드린 공의회를 지칭


3. 시리아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타인과 마카베오 독립 전쟁

시리아 왕 Antiochus 3세(-233~187년) 팔레스타인 차지
   - 유대인들은 시리아 편에 가담 - 호의적 대우 받음
        성전에 드는 비용들은 일정액 국고(시리아)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산헤드린 공의회원은 면세 혜택
   - 셀류키드 왕조(Seleukiden)의 헬라주의 문화 장려 - 문화적 갈등
     예루살렘 사제들 중에 헬라주의 추종자 많음

Antiochus 4세  통치권 계승(-175년)
   - 오니아스(Onias)는 율법 준수 하는 수석사제
     반대자 : 동생 요수아(Josua)와 헬라주의 추종자
   - 요수아는 자기 이름을 헬라식으로 야손(Jason)이라고 바꾸고,
     또한 세금을 인상하여 거둬들인 거액의 금액을 시리아에 바쳤다
     야손은 형의 수석사제직을 빼앗았고, 오니아스는 몇년 후 안티오키아에서 살해되었다.
   - 오니아스의 아들 오니아스(이름이 같음) - 이집트 레온토폴리스에 성전 건축(-160년)          
                톨레메우스의 원조를 받음. 그러나 이 성전의 중요성은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 예루살렘에서는 야손이 헬라주의화 추진.
     성전의 제사와 율법, 헬라 문명이 공존하는 혼합된 형태의 종교가 나타나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경기장에서 나체로 운동경기를 하였으며,
       할례가 비웃음거리가 되었다(1마카 1,15).
       이는 바울 시대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자주 나타났던 것 같다(1코린 7,18).
    - 3년후 메네라우스(Menelaus) - 더 많은 금액주고 수석사제가 되었다.
                                    수석사제직은 매매 할 수 있는 정치의 대상이 됨.
    -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169년 안티오쿠스) - 저항 못함(1마카 1,20-24)
    - 예루살렘 성벽 무너짐, 다윗의 도시 언덕에 폭군의 안티오쿠스의 성(Akra) 건축
        안식일과 할례가 사형으로 금지, 이교제단, 제우스에게 희생제물(-176년)
        - 마지막 때의 표징으로 이해(마르 13,14; 참조 다니 11,31; 12,11)
          다니엘서는 이러한 곤궁에 빠진 공동체에 대하여 위로 하는 책

마카베오 독립전쟁
  - 헬라화에 대한 반발 : 모데인(Modei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외국 지배권에 대한 봉기
             하스모네어(Hasmonäer) 가문의 마타디아라는 늙은 제사장
              - 이방 희생제물 준비하던 유대인을 죽이고 왕의 관리도 죽이는 사건.
- 마타디아와 그 아들들 도망하여 유대 광야로 숨는다(1마카 1,15-28)
    - 투쟁의지에 불타는 유대인 군중들이 몰려듬  
       처음에는 게릴라전으로 이방 신전을 파괴, 배교한 유대인을 징벌하는 등 테러
- 마타디아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유다가 지휘권 획득.
     유다의 별명 : 마카베오(Makkabäer, =“망치와 같은 자”(아람어의 makkaba는 망치).
- 시리아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 - 안티오쿠스 4세는 리시아스(Lysias) 장군이 대응
      예루살렘에 개선 입성, 성소를 탈환
        -제단이 새롭게 봉헌(-164년 키스레브(12월) 25일)
          일주일간 “하눅카(성전봉헌예배)”축제(요한 10,22)
           - 암흑이 빛에 의해 쫓겨남을 상징하여 등불에 점화를 하는 예식
유대의 모든 영토를 탈환하기에는 역부족. 정세는 유대인들에게 유리
       안티오쿠스 4세는 전쟁에서 사망
       리시아스가 왕자의 후견인 - 시리아를 다스림.
리시아스와 마카베오 협정 -시리아는 유대인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유대인들은 시리아의 최고 지배권을 승인하는 차원에서 협정이 조인된다.

계속되는 항전과 대제사장직의 타락
메네라우스는 유다에 의해 제거
헬라주의화 되었던 유대인들은 시리아에 유다 억압을 받고 있다고 호소(-162년)
데메트리우스(Demetrius) - 알키무스를 수석사제(헬라주의를 옹호하면서도 아론지파 출신) 
                                     봉기했던 유대인들도 그를 인정
유다 마카베오는 정치적인 독립 쟁취 : 알키무스에게 대항.
                     알키무스는 시리아에 도움 요청
            수많은 전투가 벌어져 결국 유다 사망(-60년), 추종자들은 참혹한 박해.
유다의 동생 요나단 : 시리아의 왕위쟁탈전 이용
            스스로를 지켜가게 되었고, 사마리아 남부를 지휘권 아래 둠
            알키무스 사망(-160년) 수석사제직 공석(-153년까지).
            시리아의 정세를 이용 - 수석사제가 됨(전쟁으로 더럽혀진 사람)

유대의 독립 - 하스모네어 왕조의 시작
요나단 시리아인들의 음모로 살해(-143년)
그 동생 시몬(Simon) - 예루살렘 성의 시리아 수비대와 싸워 승리
                     시리아인들에게 내던 세금을 유대로 귀속
                     자기의 화폐를 주조.
하스모네어 왕조 설립(-140년) -아들에게 지위세습(로마 승인) - 유대 독립

마카베오서는 시몬의 통치시대를 극찬(1마카 14,8-15)
예언자들의 약속실현으로 봄(미카 4,4)

많은 사제들과 경건한 유대인들은 날카로운 비난으로 대립
사제 혈통 출신도 아니고 다윗 혈통 출신도 아니면서
수석사제의 직위와 왕의 직위를 결합시킨 자리에 앉아있는 하스모네어의 지배


4. 하스모네어 왕국

1) 요하네스 히르칸
시몬 : 그의 사위 톨레메우스에 의해 살해(-134년)
       왕위는 시몬의 아들 요한네스 히르칸(Johannes Hyrkan).
시리아의 팔레스타인 침공(-128년) 저지,
       마음대로 온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군사적인 성공 : 사마리아 그리짐산의 성전을 파괴(-128년)
                  옛 에돔 이두매아를 공격 - 주민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
                  사마리아를 점령(-107년).
  유대인들로부터는 냉담한 반응 - 바리사이인 공동체 생성 - 현실주의 정치로 결별
                               - 사두가이인과 가까워 짐
  히르칸은 종교적인 위치보다는 정치적인 위치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활동을 하였다.

2) 아리스토불(Aristobul)
  히르칸 사망(-104년) - 자기 부인이 나라를 통치하도록 유언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 - 어머니를 몰아내고 세 명의 동생들을 감금  
                         동생 안티고누스만을 정치에 참여 - 곧 살해.
  최초로 “왕”의 칭호를 사용,
           많은 전쟁, 갈릴리를 정복 - 점령지역의 주민들을 강제로 개종.
아리스토불 사망(-103년) - 짧은 통치

3) 알렉산더 얀네우스
아리스토불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 - 감금당했던 남편의 동생들을 석방시키고,
                       그 중 큰 형(요나단)에게 왕위를 넘기고 그의 아내가 된다.
요나단을 헬라식으로 얀네우스(Jannäus)라고 바꾸고, 알렉산더 얀네우스라고 부른다.
솔로몬 시대의 유다와 이스라엘의 넓이에 거의 상응하는 지역을 차지
주민들은 모두 강제로 개종 - 나라가 안정될 수 없었다.

4) 살로메 알렉산드라
얀네우스가 죽자,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9년간 신중하고 지혜롭게 통치(-76~67년)
아들 히르칸 2세가 수석사제가 됨 → 바리사이인들과 화해,
                         이 때부터 바리사이인들이 산헤드린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5) 히르칸 2세와 아리스토불 2세, 로마의 개입
알렉산드라 사망(-67년).
아들 히르칸 2세와 동생 아리스토불 2세가 왕위 쟁탈전 - 아리스토불 승
이두매아의 총독 안티파테르 + 다마스커스의 아레타스 왕(히르칸의 편)
- 아리스토불과 싸움
이 때에 새로운 세력,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를 점령
일반 백성들은 폼페이우스가 이 두 세력을 모두 폐하고
옛 대제사장의 통치권을 회복시켜 줄 것을 원하였다. - 폼페이우스는 방관적 태도


5.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1)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입성
히르칸과 아리스토불이 모두 폼페이우스의 호의를 얻으려 함  
→ 폼페이우스는 결단을 미룸
→ 아리스토불은 군사적 방법으로 자기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 하였다.
의심이 생긴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까지 진격,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에 들어갔고, 지성소까지 실제로 들어가 보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성전에서 아무 것도 탈취하지 않았지만,
이방인이 지성소에 직접 들어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사건이었다.

히르칸을 수석사제로 임명 -
      수석사제에게는 예루살렘의 성전종교에 직접 포함되는 공동체들의 통치권만
       이로써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스모네어 왕조가 차지하였던 영토들은 각각 독립
       - 데카폴리스(마르 5,20; 7,31; 마태 4,25)
         사마리아 독립  

2) 카이사르의 통치와 총독제도의 등장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Caesar) 사이의 싸움
  - 히르칸과 안티파테르는 승리한 쪽 파벌에 가담
카이사르는 히르칸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해 주었고,
           안티파테르는 세습적인 로마 시민권을 획득,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

여기서 로마의 권세를 대표하는 총독의 권세와
전통적으로 유대를 다스려 왔던 대제사장의 권세가 대립.
   - 유대는 로마의 보호에 들어가게 되었다.

안티파테르는 두 아들 파자엘과 헤로데로 하여금 각각 유대와 갈릴리를 통치하게 하였고,
이들은 산헤드린에 대항하여 상당한 권세를 지니게 된다.

3) 헤로데의 통치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부르투스는 안토니우스에게 패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는 정변이 일어나게 된다.

안티고누스(아리스토불 2세의 아들)+ 파르테르 유목민과 동맹 - 히르칸 공격.
헤로데는 로마로 도망가 안티고누스에게 대항,
          로마 원로원의 공식적 결정으로 “유대의 왕”으로 임명.
        - 로마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을 점령(-37년), 안티고누스를 사형.
   - 나라를 완전히 장악. - 놀라운 정치적 수완(옥타비아누스의 신임).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 중에서 수석사제 임명,
      늙은 히르칸을 살해, 자기 아들마저도 죽임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죽였다(마태 2,16) 이야기는 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헬라화 정책 추구 - 헬라식의 목욕탕, 극장, 체육관 등을 건축하여 헬라인들의 환심,
                   성전을 화려하게 확장, 수축하여 유대인들의 호응.
                   전체 유대인의 리더는 못됨.

이 시대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바리사이인이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등장 (마태 2,1; 루카 1,5)

4) 분봉왕 시대
헤로데사망(-4년) - 세 명의 아들에게 자기가 다스리던 영역을 분할(유언).
  이 세 아들은 아버지가 죽자 각기 더 많은 지역을 얻어내기 위해 로마로 갔는데,
  예루살렘에 주민들은 로마가 이 세 아들들의 통치권을 없애주기를 원하였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루카 19,12-14의 비유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옥타비아누스(Augustus)는 헤로데의 유언대로 원칙적으로 일을 처리
아르켈라우스(Archelaus)-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아 지역
헤로데 안티파스(Herodes Antipas)- 갈릴리와 동부 요르단의 베뢰아
필리푸스(Philippus) - 북부 동부 요르단 지역

세 사람이 로마에 머무는 동안 유대에는 소요 - 시리아에 주둔 로마군이 이를 평정
                                           유대에는 반로마적 분위기가 팽배
아켈라우스 가장 포악(마태 2:22) - 신하들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에게 호소
               아켈라우스를 갈릴리로 추방(6년), 로마 총독의 지배(루카 3,1)

로마 총독 :  시리아의 카이사리아(Caesarea)에 거주
    - 유대인들의 대축제일(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왔다(폭동의 가능성).
    -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다.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에는 군기를 세우지 않고 들어왔다
       (유대인들이 이를 우상으로 인식).
    - 최고 권력은 총독에게 있었다
      산헤드린이 사형선고나 집행을 하는 것은 불가능(요한 18,31).


5)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us)
예수 시대에는 빌라도가 총독(26-36년)으로 있었다.

*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빌라도의 직무수행이 “뇌물, 폭력, 약탈, 불법, 무례, 재판없는 사형집행, 계속되는 잔학”으로 이루어졌다고 쓰고 있다.

-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황제의 초상이 달린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게 한다.
       - 유대인들이 죽음울 불사하고 저항할 것을 선포 - 되돌려 놓음
- 예루살렘에 수도 설비 - 성전 금고의 돈을 사용 - 항거- 폭력으로 진압
- 사마리아 그리짐산에 모인 군중 - 군인들을 진격시켜 해산, 많은 사람들이 살해 체포
      - 사마리아인 불평(특사 비텔리우스) -로마 소환 책임해명

갈릴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려고 했을 때 빌라도가 그들을 학살(루카 13,1).
혁명의 의심을 받을만한 사람은 곧 체포하여 죽였다(마르 15,7//27).

6) 헤로데 안티파스
갈릴리(게네사렛) 호수가에 수도를 건설 - 티베리아(Tiberias)(참조 요한 6,1,23; 21,1)
        티베리아는 옛 묘지터에 건설 - 유대인들은 정결하지 못한 장소라 사는 것을 거부

처음에 다마스커스의 공주와 결혼
헤로디아와 결혼하고 원래의 처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이 사건 때문에 세례 요한이 갇히게 되고, 결국 처형을 당하게 된다.
* 이혼은 허용(신명 24,1-4) 형제의 부인 빼앗는 것 금지(레위 18,16; 20,21) 율법을 어김

자기 딸이 쫓겨온 것을 본 다마스커스의 왕 - 안티파스를 공격 - 처참한 패배
이 사건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세례 요한에 대한 보복으로 보았다(요세푸스 기록).

- 황제 칼리굴라에게 왕위 요청 - 칼리굴라의 의심 - 갈리아로 추방당하게 된다(39년).

7) 필리푸스
필리푸스는 북부 동요르단 - 가이사리아 필립보(Caesarea Phillippi)수도를 건설
  - 로마 황제의 초상화를 새긴 화폐를 주조 - 유대인 소수였기 때문에 문제 없었음
후손없이 사망(34년).

8) 헤로데 아그리파스(Agrippa)
헤로데의 손자 아그리파스 : 로마에 살면서 황제 칼리굴라의 호의를 얻음
- 헤로데가 다스리던 지역을 자기 왕권 밑에 통합.
필리푸스가 다스리던 지역(37년),추방된 안티파스의 지역(39년),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의 통치권까지(41년) 갖게 된다
- 칼리굴라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자기의 상을 세우도록 요구
    그것을 실행하려다 유대에는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있었다.
- 칼리굴라는 암살(41년),
- 후계자 클라우디우스는 유대인들이 자기를 성전에서 신적으로 경배 요구하지 않았다.
- 스스로 율법을 따르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주장.-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칭송
- 유대교와 헬라 문명 사이에서 두 얼굴을 가지고 정치를 계속.
    바리사이인들을 위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박해, 야고보 처형, 베드로 체포(사도 12,1-3).

9) 아그리파스 2세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재판했던 왕은 아그리파스 2세이다(사도 25장).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가 죽은 후, 그가 다스리던 땅은 시리아의 식민지
                      지방 총독들에 의해 통치, 관청소재지는 가이사리아
몇 년 후에야 전에 필리푸스가 다스리던 지역을 받았다.
예루살렘 성전을 감독하는 권한 - 이를 이용하여 대제사장이 된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아그리파스에 대해서 불만
       누이 베르니케를 늘 옆에 둠으로써(사도 25,13) 근친상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10) 로마 총독의 지배 - 펠릭스(Felix)와 페스투스(Festus)
아그리파스 2세가 다스리는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로마 총독들이 다스리게 되었다.

총독 펠릭스는(52년부터) 온갖 포학과 욕심으로 다스렸던 자였다.
    노예출신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호의를 얻어총독이 됨,
    두 번째 부인 드루실라(아그리파스 1세의 딸)를 전 남편에게서 빼앗아 맞아들였다.

로마 총독들의 지배동안, 유대인과 로마인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다.
계속된 혁명당원과 로마군의 충돌이 일어났다.

펠릭스의 후임자 페스투스 : 전임자들에 비해서는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긴장을 해소시키지는 못함
                     62년에 사망, 바오로가 구금되어 재판(사도 24,27-26,32)

사도행전에는 펠릭스와 페스투스가 언급된다.

바오로의 변호 (사도 24,24)
며칠 뒤에 펠릭스는 유다 여자인 자기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오로를 불러내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앙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바오로가 구금되어 재판(사도 24,27-26,32)



6. 유대 전쟁과 바르 코흐바의 폭동

로마와 유대의 갈등 증폭.
가이사리아에서 헬라주의 주민들의 반유대인 시위
   - 로마인에게 돈주고 보호 요청 - 도움 받지 못함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 - 성전 금고에서 17달란트를 강탈(66년)
         유대인들은 격분, 총독을 반대하는 시위(가련한 총독을 위한 동냥)
    - 군인들을 보내 예루살렘을 약탈 허용.
       파병하며 열광적으로 환영하라고 유대인들에게 요구
         →명령대로 군인들을 환영하였으나, 군인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를 굴욕으로 여긴 유대인들이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그리파스 2세는 유대인들을 진정시키려 하였으나 봉기의 불은 꺼질 줄 몰랐다.
       폭동을 막으려던 대사제 암살 → 로마군을 기습 안토니아 성을 점령
                      시리아의 로마 총독 체스티우스의 군대를 격파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독립을 쟁취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네로(Nero) 황제는 베스파시안(Vespassian)을 파견 유대인들을 진압
베스파시안은 안티오키아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고,
그 아들 티투스는 이집트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진격

갈릴리는 모두 로마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67년).
요세푸스는 요타파타에서 항쟁 - 47일간 항거 - 베스파시안에게 항복

전쟁의 결판은 예루살렘에서 날 수밖에 없었다.
   성전지역 - 기샬라의 요한네스
   도시의 나머지 - 시몬 바르 기오라(Simmon Bar Giora)
두 지도자의 부하들이 적대적으로 대립

폭동에 참여하지 않은 원시공동체 - 동부 요르단의 펠라로 감

베스파시안이 황제에 추대(69년)- 네로가 쫓겨남
티투스 사령관 -예루살렘을 포위(70년 유월절 기간),
                 성전은 최후의 전투에서 불타버렸다.
                 지성소가 파괴 되기 이전에 지성소에 침입

성전과 도성이 파괴됨으로서 유대교는 가시적인 중심점을 상실
항거 계속 - 마사다가 함락 (73-74년)
     마사다에서 항거하는 사람들은 로마의 군대가 진입하기 전에 모두 자결

유대는 황제의 식민지가 됨(사마리아에서 분리)- 총독은 가이사리아에서 집무
                   로마 10군단이 상주

성전 파괴 - 유대교는 다시금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형태로 변화.
    사두가이인들은 전쟁 가운데 많이 죽임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수석사제와 사두가이인들의 신앙은 성전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 세력이 몰락
    바리사이인들은 율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세력이 확립
    Jamnia 에서는 율법학자들로만 구성된 새로운 산헤드린 구성(사제와 원로 회원 없음)
    로마는 원칟적으로 유대교 귀속권리 침해 않음
       - 회당들은 국가 관청의 보호 받게됨(세금으로 성전세)

바르 코흐바의 폭동
팔레스틴의 유대교는 한번 더 로마의 멍에 에서 벗어나려는 시도(132-135년)
자료 : 와디 무라바아트(Wadi Murabba'at)에서 이 시대의 많은 문헌 발견  

하드리안(Hadrian) 황제 : 유대인들은 갑작스런 봉기
   예루살렘의 성전터에 쥬피터 성전을 세우도록 명령
   할례와 거세 금지 (이스라엘 계약의 징표)
폭동의 지도자 : 별의 아들 = 바르코흐바
               랍비 아키바(aqibq)에 의해 민수 24,27에 약속된 자로 환영
        바르코흐바가 메시아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체포, 처형 되었다.
사해 변의 요새 벳 테르(Beth-Ter) - 로마인들에 의하여 점령되고
                                   바르코흐바는 전투에서 사망

* 유대교에서는
거짓 메시아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고
하느님의 유일성을 모독할 때에만 죄를 묻게 된다 (참조 요한 5,18; 10,36)

예루살렘 페허 위에는 로마의 식민도시 건설- 쥬피터 신전, 비유대인만 거주
기원 4세기 : 슬픔의 날에는 도성에 들어가서
            헤로데의 성전 가운데 남아있는 벽에서 통곡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허용.


요한 5,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요한 10,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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